북한 주민의 삶
북한에서 가르치는 주체사상의 주체는 ‘김일성’이다. 그것이 2대 김정일, 3대 김정은까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자신의 주체가 김일성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다. 즉, 주체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의 권리와 당신의 자유를 찾으라고 하는 것은 어디에도 흡수되지 않는 떠도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아무도 북한에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 규민 (1999년 탈북).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국가로서 2,500만 주민의 일상 생활을 정확히 파악하기엔 어려움이 있다. 외부인의 북한 방문은 엄격히 제한되며 면밀하게 감시된다. 북한 당국이 제공하는 통계 수치도 당의 편의를 위해 부풀리거나 적게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북한의 현실을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탈북에 성공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생활필수품 부족, 불법 감금, 강제 노역, 선전 교육 등은 총 30,208명, 2016년 한 해에만 414명이 중국과 동아시아를 통해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한 이유다.
기근과 영양실조
“우리는 일터에서 돈이나 식량 배급을 거의 받지 못해 항상 배가 고팠다.” – 아영, 사리원방직공장 직포공 (2009년 탈북)
북한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기근과 주민들의 영양실조이다. 북한 주민들이 식량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장마당을 통해 얻는 방법이고 나머지는 정부가 제공한 배급량을 통해서이다. 유엔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북한 정부는 2017년 1월 기준 1인당 하루 400g을 배급했다. 이는 1인당 하루 권장량인 600g을 크게 밑도는 수준이다.
북한 주민들은 2016년 홍수로 133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잦은 홍수와 가뭄에 피해를 본다. 북한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적절한 조치를 못 취하고 있어 주민들의 일일 식량 배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이 극심한 기근으로 고통받던 ‘고난의 행군’ 동안 약 10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북한내 영양실조의 심각성은 북한의 아동 사망률이 남한보다 10배나 높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먹을 게 없어서 닥치는 대로 다 주워다 먹거든요. 풀뿌리도 캐 먹고, 길바닥에 떨어진 것도 씹을만한 건 뭐든지 주워다 먹었는데 […] 아이 셋을 모두 탁아소에 맡기고 일을 나가던 엄마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집 아이 셋이 모두 굶어 죽었습니다.” – 정숙, 탁아소 보육교사(2013년 탈북).
“약이 없고 의료도구가 부족하니 의사로서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주민들도 이젠 의사를 찾지 않았죠.” – 철민, 내과 의사 (2005년 탈북).
병원에서 파는 의약품은 대개 너무 비싸기 때문에 아픈 주민들은 암시장인 장마당에 가서 약을 구하며, 주로 집에서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한다. 병원의 의료기기 또한 관리 미흡과 불안정한 전기 공급으로 구식이며 안전하지 못하다.
북한에서는 전기가 귀해서 평양의 엘리트 아파트들도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기가 어렵다.평양 밖에 사는 북한 주민들은 보통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 석탄을 태우며, 호흡기 질환의 위험에 처한다. 겨울에는 기온이 -13°C까지 내려간다. “철로 위에서도 아이들이 많이 잤어요. 기차가 오고 가니 마찰 때문에 따뜻했거든요. 어떤 아이는 다리를 올려놓고 잠들었다가 열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두 다리가 동강 잘려나가기도 했습니다.” – 옥주, 외과 간호사 (1997년 탈북).
불법 감금
모든 북한 남성들은 최소 10년 동안 군대에 입대해야 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들은 휴가도 거의 받지 못한다. 북한 사람들은 외부 세계, 특히 미국과 남한을 “주적”으로 여기도록 교육받는다.
”북한 연기는 생각한대로 하면 안 되고, 정해진 연기를 해야 합니다. 미국을 말할 때는 반드시 화가 난 상태여야 하고, 북조선을 말할 때는 언제나 긍정적이어야 하죠.” – 규민, 영화감독 (1999년 탈북)
실질적으로 18호 북창 수용소는 연좌제에 의한 친족들이 수용되고 있다. 충성심에 금이 간 사람으로 한번 기록이 되면 본인은 물론 2대, 3대까지도 혁명화 대상이 된다고 했다. 부모나 친척이 저지른 죄로 인해 수감되는 경우도 있으며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이유도 모른 채 수감 생활을 한다. 북한 주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정치범으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에 갇히는 것이며, 출신 성분이 삶의 질을 좌우하기 때문에 명예를 잃지 않고 후대에 죄를 물리지 않기 위해 언제나 긴장하며 살아간다. 자살도 죄가 되어 가족에게 죄가 옮겨가기 때문에 고문을 당해도 쉽게 자살을 시도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월남을 시도하면 가족이 위험에 처해지기 때문에 쉽게 시도할 수 없다.
”외교관은 해외에 나갈 때 온 가족을 모두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가족 중 일부를 반드시 북에 남겨놓고 가야 하는데, 한마디로 가족을 볼모로 잡힌 거나 마찬가지인 겁니다.” – 영건, 외교관 (2012년 탈북)
”정치범 수용소 중에서 25호 만큼은 확실한 반동 행위의 증거가 있을 때 가게 됩니다. 25호 수성 교화소는 거의 살아서 못 나오는 곳이라고 보면 됩니다.” – 민철 (15호 요덕수용소 3년 수감)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수용소가 정치범들만을 수감하기 위한 시설이라라고 말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흉악범들과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파벌들도 수감하기 위한 곳이라고 말한다. 수감 경험이 있는 탈북민 민철씨를 통해 중국을 넘나들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잡힌 사람의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는 회령 철도국 선로반에서 근무를 하던 사람이었으며, 성경책을 중국에서 들여온 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다가 잡혔다고 한다.
”그 친구가 최종 판결을 받던 마지막 밤이 생각나네요. 굉장히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더니 “저는 수성교화소 15년 형을 받았습니다.” 하더군요. 그리고 죽어도 괜찮다며 계속해서 기도를 했어요. 마지막으로 끌려 나가던 순간에도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 모습을 정말 잊을 수가 없네요.
선전
강제 노동
북한 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하고 조국을 위해 목숨 받쳐 싸워야 한다고 배운다. 북한의 교육 과정은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선전물은 모든 곳에 있고, 영화, 텔레비전 쇼, 극장, 만화책, 거리의 포스터 등 삶의 모든 면에서 마주치게 된다. 북한 주민들은 한 달에 몇 번씩 김일성 김정일 기념비를 방문해야 하며, '친애하는 지도자'의 사진 액자를 집에 걸어 매일 깨끗이 닦는다.
대부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성분과 돈이 없어 북한 주민들은 집단농장, 공장, 건설현장 등에 동원된다. 그들은 직업의 선택권 조차 없이 하루에 12시간에서 16시간까지 강도 높은 노동을 한다.
“원래 관절이 약한 편이었는데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직물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6년 만에 두 다리 관절이 모두 망가져 입원을 했어요. 비로소 마음껏 쉴 수 있어서 좋았죠.” – 아영, 사리원방직공장 직포공 (2009년 탈북).
노동의 대가로 그들은 봉급과 식량을 거의 받지 못한다. 예를 들어, 집단 농장에서는, 각 노동자에게 하루에 할당량을 주고, 할당량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노동자는 먹을 것을 얻지 못한다. 건설현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지만, 다쳐도 부상에 따른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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