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라는 주홍글씨

 

제 친구는 북한 사람들이 뿔 달린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이미지가 좀 무장, , 군사적인 것들이 있잖아요. 북한 출신에 대해 편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천안함 이나 연평도 사건 터지면 그 불똥이 나한테 튈까봐 ... 안타까워요... 근데 제가 한 건 아니잖아요. 전 그곳에서 태어난 것뿐인데...”


90년대 북한에 찾아온 극심한 식량난으로 수많은 북한 주민들은 탈북을 감행했습니다. 이민영(가명)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열살 맏이였던 그녀는 한입이라도 덜기 위해 목숨을 걸고 어머니와 함께 중국으로 탈출했습니다. 고된 탈북 과정을 민영씨는 앞으로 정착하게 될 한국에서의 자유, 학교생활에 대한 갈망으로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초등학교 1학년 까지만 다닌 민영씨에게 학교는 새로운 꿈의 장소였습니다. 무사히 한국에 도착하여 하나원 생활을 마친 후, 13살이 된 민영씨는 초등학교 6학년으로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민영씨의 학교 생활은 그녀의 기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녀가 탈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민영씨는 근거 없는 소문과 따가운 시선들에 시달렸습니다. “거의 뭐 학교를 동물원 원숭이처럼 지냈죠.” 새터민에 대해 무지했던 민영씨의 또래 친구들은 민영씨가 북한 억양을 쓴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속칭 짱깨라고 멸시하며 조롱했습니다. 민영씨의 말에 의하면, 새터민 청소년 중 민영씨처럼 초중고교를 모두 한국에서 졸업한 사람은 10%가량 밖에 없다고 합니다. 따돌림, 언어 폭력 등에 시달리다 결국 자퇴 혹은 대안학교를 선택한 학생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민영씨는 유년시절에 찾아온 정체성 혼란으로 인해 힘든 나날을 보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민영씨의 학교 급우들은 한국과 북한의 대외관계가 악화될 때 마다 괜히 눈을 흘기거나 북한년이라며 모욕적인 말을 서슴지 않고 했습니다. 민영씨는 어린 나이에 탈북하여 사춘기 시절 남한에서 모든 교육을 받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항상 북한사람이라는 낙인이 민영씨를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민영씨는 본인이 남한 사람인지 북한 사람인지 결론을 내리는 게 쉽지 않았었다고 말합니다.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민영씨는 현재도 본인이 북한 태생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낯선 곳에서의 인연

 

엄마 진짜 당신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것 같다

 

많이 힘들었을 당시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민영씨에게 우리가 어떻게 극복했는지 물어보았을 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엄마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맨날 []엄마를 부르고 서러워서 맨날 엄마 엄마 하면서 울고 그랬어요. 나와서는 한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양엄마와] 지내면서 한번도 엄마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이 없어요. 진짜 당신 속으로 낳은 자식도 아닌데 그렇게 해준다는 것이. 엄마 진짜 당신 같은 사람은 이세상에 없을 거 같다고.”

 

민영씨는 감사하게도 저희에게 성통만사와의 10년 넘게 맺어온 특별한 인연도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지인을 통해 처음으로 성통만사에 대해 알게 되어 저희의 1:1 튜터링과 수요영어교실에 꾸준히 참여해 영어 실력을 점차 늘여갔습니다. 그리고 3년 후, 대학생이 된 민영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한국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새터민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성통만사의 교육 프로그램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저희는 성통만사에서의 경험을 반추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는 지를 여쭈어 보았습니다. “성통만사는 나의 일부, 가족 같아요. 여기 사람들 제가 꽤 오랫동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났어요.”

 

성통만사가 그녀의 삶에 소중한 일부로 자리잡았다는 민영씨의 말에 우리는 감사함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단순히 학업 만을 도와주는 단체가 아닌, 새터민들이 한국에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저희 성통만사는 앞으로도 최대한 많은 분들께 도움을 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민영씨! 앞으로 한국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살아가시기를 저희 성통만사가 항상 응원하겠습니다~

 

작성자: 교육지원팀 권성희, 유예나